Romain Rolland, 15 Aug 1917

Original link

Ромен Роллан

Grand Hotel Chateau Bellevue, Sierre, Switzerland

Русская революция подавлена союзниками. Большевики затравлены. Смертная казнь в армии восстановлена. Несчастный Керенский играет роль марионетки-Дантона в руках Англии и президента Вильсона. Демократические государства Запада отказываются давать паспорта своим социалистам, желающим поехать в Стокгольм, и душат свободу во имя свободы. Убитая Европа встала на путь к разверстой могиле.

러시아혁명은 연합군에 의해 끝났다. 볼셰비키들은 박해 받았다. 군대 내부에 사형제도가 복원되었다. 불운한 케렌스키는 영국과 윌슨 대통령의 손에 놀아나는 당통의 인형이나 다름 없었다. 서방의 민주국가들은 스톡홀름으로 가려고 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여권 발급을 거부했고,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했다. 사망한 유럽은 무덤으로의 길에 들어섰다.

Do you believe in destiny?

Людвиг. Мой вопрос следующий: Вы неоднократно подвергались риску и опасности, Вас преследовали. Вы участвовали в боях. Ряд Ваших близких друзей погиб. Вы остались в живых. Чем Вы это объясняете? И верите ли Вы в судьбу?

Сталин. Нет, не верю. Большевики, марксисты в “судьбу” не верят. Само понятие судьбы, понятие “шикзаля” – предрассудок, ерунда, пережиток мифологии, вроде мифологии древних греков, у которых богиня судьбы направляла судьбы людей.

 

Сталин И.В. Беседа с немецким писателем Эмилем Людвигом 13 декабря 1931 г.

Источник: Сталин И.В. Cочинения. – Т. 13. – М.: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издательство политической литературы, 1951. С. 104–123.

Примечания 26–30: Там же. С. 387–388.

Russian text

English translation

State Archive of the Tomsk Region (ГАТО)

On 6 Apr 2017, I visited a local Russian archiv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With the help of a brilliant Russian friend-assistant, I was able to get an one-time entrance card, search the materials I needed and request them. Fortunately, unlike for the Tomichi, the locals living in the region, the materials I was looking for were prepared after 8 days. I heard that it would usually take longer, even for a month, for the Tomichi because international visitors/researchers do not have much time to stay here.

On 14 Apr 2017, I was taken aback by the Archive’s preparedness. Initially, I requested ten items and was guaranteed orally that I could take pictures of the materials. However, it seemed that the Archive decided to issue just 6 or 7 items for me because the materials I ordered were ‘personal.’ Still, I have an access on the rest of the items, mostly letters between the person and his wife. Alas, they brought us into the small room and told us that we could read the materials shown on the computer screen. I tried to take pictures with my iPad, but soon I ceased to do that. Resolution was low and protecting my eyes was important.

Meanwhile, upon reading of the materials between Comrade Shipulin (Шипулин М.Д., 1919-199?) and his wife, I came to conclude that discovering any North-Korea-related materials in this archive was next to impossible. The exchange of letters between the couple suddenly stopped in some point of August 1945. According to a daughter’s memories of her parents, the Shipulin couple had worked in the city of Hoeryong (Хайрен) until their return to the Soviet Union in early 1948. Given that Comrade Shipulin and his wife are the only Tomichi who served in nowadays North Korean territory so far, it is highly unlikely to find any more sources that would reveal historical connections between Tomsk and North Korea.

But it was great and valuable experience, which I could absolutely recommend to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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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 hours of G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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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y thanks to Kirill (Kyle) Avteni, my great Russian brother

역사학에서 학생의 잠재력

원문 링크.

* 이하 본문에서 대괄호 안의 설명은 역주임. 추가로 미국회도서관 소장 장학봉 옹의 수기를 참고할 것.

역사학에서 학생의 잠재력. 쿠르스크국립대 역사학과에서 고려사람[소련계 한인/조선인, 이하 고려사람으로 통일]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준비하려는 시도.

역사적 조국에서 고려사람의 역사에 관한 쿠르스크국립대의 연구 프로젝트가 역사학과 학생들의 주의를 끄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전문성을 갖춘 역사학자 및 국제정치학자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 작업은 ‘국제관계의 역사'(지도교수 – 이.엔. 셀리바노프 교수) 프로그램에 소속된 대학원생 및 학부생 주축의 학술동아리인 ‘클리오'[역사의 신](지도교수 – 이.아. 코노레바 교수) 소속으로 장차 ‘역사’를 전공하려는 학부생이 수행하고 있다.

아래는 1945~1961년 북한에서 근무한 뒤 타쉬켄트에 정착한 고려사람의 친지들이 제공한 글과 사진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이반 골리코프, 나탈리아 모스칼렌코, 파울린 플라스키나가 작업하였다. 프로젝트의 다른 성원들은 조만간 다른 고려사람 여섯 명의 전기(傳記)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교수들은 이하의 자료가 고려사람 사이트를 찾는 방문객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고 새로운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서책 형식으로 <북한의 고려사람>을 간행하는 데 필요한 작업들이 계속 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고려사람> 출판은 현재 쿠르스크국립대 역사학과에서 준비 중이다.

이리나 코노레바 – 쿠르스크국립대학 역사학과장 및 연구교육소장

이고르 셀리바노프 – 쿠르스크국립대학 일반사 분과장

***

김영활

김영활은 연해주 태생으로 1910년 쇠락한 조선인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곧 아버지를 잃게 되었는데, 그는 역사적 조국[조선]에 거주하는 형제에게 가던 도중 첩자로 의심을 받아 [조러]국경에서 매맞아 죽었던 것이다. 당시 김영활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지만, 생계를 위한 허드렛일과 학업을 성공적으로 병행하였다. 그는 극동국립대학교 동양학과를 졸업했는데, 친척의 증언에 따르면, 동양어(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노어도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김영활

1937년 고려사람 강제이주 당시, 그는 아스트라한으로 옮겨져 어육가공공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가 타쉬켄트 지역(oblast’)에 위치한 집단농장 ‘볼셰빅’에 부설된 학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1941년 김영활은 전연방공산당(볼)에 가입하였다. 1944년 그는 당조직자로서 조선극장으로 이동하여 근무하게 되었으나, 곧 붉은 군대에 동원되어 일제의 점령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극동전선 제25군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1946년 그는 동원에서 해제됐고, 한국어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북조선에 통역원으로 잔류하였다. 1948년 소련군이 철수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 김영활은 북한에 남아 <쏘베트 신보>에 취직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조선인민군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조쏘친선>의 책임편집자직을 맡아 근무하였다. 1957년 김영활은 최고인민회의 위원장 최용건의 비서를 맡았다.

통역원으로 복무할 당시의 김영활(왼쪽에서 세 번째), 평양

1961년 김영활은 가족과 함께 타쉬켄트로 돌아왔으나, 곧 유즈노사할린스크의 [당기관지인] <레닌의 길> 신문사의 편집원으로 파견되었다. 1965년 그는 크즬오르다로 이사하였다. 새로운 곳에서 그는 <레닌기치> 신문사의 편집자가 되어 1968년까지 근무하였다.

1968년 이후 <레닌기치> 신문사의 언론인 김영활은 카라칼파크스탄 공화국 및 호레즘 지역의 통신원이 되었다.

1978년 사망했다.

가족에 대해서

김영활의 가족

김영활은 31세의 나이인 1941년 유가이 스베틀라나 막시모브나와 결혼했고, 그때 당시 이미 타쉬켄트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듬해 부부는 첫 자녀를 보았는데, 바로 딸인 클라라였다.

1946년 가족은 북조선 땅에서 재회하였다. 1950년에는 두 번째 자녀인 아들 아나톨리가 태어났다.

아내 유가이 스베틀라나 막시모브나와 김영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가족은 타쉬켄트 지역으로 대피하였다. 가족의 재회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가능했다. 1954년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비사리온이었다. 1961년 김영활은 가족과 함께 타쉬켄트 지역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아들들과 함께 있는 김영활, 평양

딸 클라라는 지역경리전문학교를 나와 주택사업소에서 근무하였다. 아들 아나톨리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사업에 종사하였다. 둘은 현재 모두 은퇴한 상태이다. 차남 비사리온은 멘델레예프 명칭 모스크바 화학기술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뒤 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같은 대학에서 부교수가 되어 교질화학(膠質化學)을 가르쳤다. 2005년에 사망했고 현재 타쉬켄트에 묻혀 있다.

자료 준비: 골리코프 이.

***

조영철

조영철은 1909년 12월 14일[장학봉은 13일이라고 썼다] 원동 포시예트 구역의 남촌[장학봉은 함경북도 길주군 화대면 하평촌이라고 썼다] 마을에서 태어났다. 1918년부터 1924년까지 소학교에서 공부한 뒤, 부모와 일했고 제재소(製材所)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1930년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시에 소재한 사범전문에 입학했고, 졸업한 뒤인 1933년에는 원동주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브카 아조프 구역의 한 마을로 파견되어 근무하였다.

조영철

1937년 강제이주의 결과로 조영철은 종래의 교직을 포기하고, 아내인 유가이 나제즈다 일리니치와 타쉬켄트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새롭게 정착한 곳에서도 조영철은 지식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즬오르다의 사범전문에 입학하였다. 공부를 마친 후, 그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와 타쉬켄트 지역 싀르다리야 구역의 고등중학교에서 선생님이 되었다.

1941년부터 조영철은 타쉬켄트 지역의 <새로운 길> 집단농장에서 근무하였다. 그의 삶은 1945년에 들어와 크게 바뀌었다. 붉은 군대에 징집돼 북조선으로 파견됐고, 거기서 그는 한국어로 발행되는 평양 신문인 <조선신문>의 문학교정원으로 근무하였다.

<조선신문> 편집부

1942년부터 1947년의 기간 동안, 조영철과 아내 나제즈다 일리니치의 삶은 몇 번의 즐거운 사건으로 특징지어진다. 1942년 그들의 첫째 아들인 발렌찐 (이후 기술과학 박사)이 태어났고, 3년 후에는 차녀 벨라가 태어났다. 1947년에는 막둥이 로자가 태어났다.

조영철은 한국전쟁에도 참가하였다. 당초 그는 후방사령부 특별군정대표가 되었고, 1년 후에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제6부[문화기재 담당]장에 임명되었다.

조영철

한국전쟁이 끝난 후, 조영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보건성 부상에 임명돼 1959년까지 근무하였다.

가족과 함께. 평양, 1959년

1960년 조영철은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왔고, 한동안 이르쿠츠크 지역 안가르스크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부소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1961년 그는 다시 거주지를 바꿨고 타쉬켄트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그는 키로프 명칭 공원 소장(1962~1963)으로 근무했고, 공화국에서 수여하는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기까지 7년간 쉬지 않고 근면하게 농업 부문에서 일하였다.

수년간, 조영철은 “대일전 승리” 훈장, “조선해방” 훈장 등 소비에트 훈장을 수여받았고, 북한 국기 2급 및 3급 훈장과 함께 “자유를 위하여” 훈장을 받았다.

조영철은 1980년 사망했고, 타쉬켄트에 묻혔다.

자료 준비: 모스칼렌코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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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이 니콜라이 안드리예비치 (유성걸[노어로는 “유성철”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오기이다. 유성걸과 兪成哲은 다른 인물이며, 유가이는 유성걸이다])

유가이 니콜라이 안드리예비치 (한국 이름 – 유성걸)는 원동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노어로는 노릴스크-우스릴스크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분명한 오기이다]의 노동자 가정에서 1920년 3월 20일[장학봉은 13일이라고 썼다] 탄생했고, 가족의 유일한 자녀였다.

유가이 니콜라이 안드리예비치(유성걸)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유가이는 부모와 함께 타쉬켄트 지역 치나스에 정착했고, 거기서 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1942년 우즈베키스탄국립대학을 졸업하였다. [고등]교육을 받고 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에 유가이는 학업을 마친 후 양기율의 한 고중[제11호 고중]에서 노어노문을 가르치게 되었고, 동시에 교무주임을 겸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하였다.

1945년 2월 3일 유가이는 전연방공산당(볼)에 입당하였다. 바로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급격하게 변하였다. 1945년 10월 유가이는 붉은 군대에 징집되었고, 곧바로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에 배속되었다. 당시 제25군은 북조선에 주둔하였다. 한국어와 노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1945년 11월 9일 군사통역원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부터 유가이는 조선인민군 제11항공독립교도사단 정치부장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10월부터 1955년까지 소장 계급으로서 조선인민군 비행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10월부터 그는 평양외국어대학 부교장으로 지냈다.

1960년 4월 그는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갔다.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 나들이

그는 소련 국방부의 도움을 받아 소련군 소령 계급으로 타쉬켄트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우즈베키스탄공산당 고급당학교에서 4년간 공부하였다.

아내와

1964년 [고급당학교] 졸업 후, 그는 타쉬켄트의 레닌 구역 내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88년 은퇴하여 연금생활에 들어갔다.

아내와 자녀와 함께

유가이와 아내에게는 모두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았다. 유가이는 1994년 타쉬켄트에서 사망했다.

자료 준비: 플라스키나 페.

***

How to Get a Russian Visa (Student)

러시아 학생 비자를 받았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학생 비자를 최소한의 ‘나가리’로 받아 보죠!

+ 비자를 여권에 받기 전까지 비행기표를 구입하지 않으시길 추천 드립니다. 초청장이 늦게 오는 것은 일상다반사이고, 비행기표가 종이쪼가리로 전락하는 것은 빈번하기 때문입니다.

+ 비자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제가 받은 것은 학생 비자 (ОБЫКНОВЕННАЯ УЧЕБНАЯ; 일반 교육)입니다. 학생 비자 외의 다른 비자 발급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준비물과 진행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0-1. HIV 테스트 (AIDS) 확인서; 지정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사진 2장, 여권을 가지고 가십시오. 저의 경우, 신촌 세브란스 병원 (02-1599-1004)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하고,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았습니다. 5만원. 당연히 러시아인지라 비자를 받은 후에도 교육기관에서 HIV 확인서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원본을 미처 복사하지 못하신 분은 다시 전화를 걸어 재발급 신청을 하십시오. 이때 준비물은 사진 1장, 여권, 그리고 재발급비 1만원입니다. 유효기한은 검사시로부터 최장 3개월이니 3개월이 넘었을 경우엔, 5만원을 내셔야 합니다.

0-2. 최근 6개월 이내에 찍은 가로 세로 3.5 x 4.5 cm 사이즈 사진 1장. 더 자세한 규정은 여길 참조. 사진을 비자신청서에 붙여서 가셔야 합니다. 저의 경우, 거기 계신 러시아인 직원께서 붙여 주셨습니다.

0-3. 본인의 여권.

1-1. 러시아 교육기관으로부터 발급된 초청장 (приглашение); 이게 있어야 비자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 전자 초청장이 pdf 파일로 왔습니다. 반드시 인쇄하여 두십시오.

1-2. 러시아 교육기관으로부터 발급된 입학 허가서 (Official Letter of Admission); 역시 pdf 파일로 왔습니다. 반드시 인쇄하여 두십시오.

2. 비자신청서; 러시아연방 외무성 영사국 전자 비자신청서 사이트에서 작성할 수 있습니다. 초청장에 적힌 정보대로 작성을 하고, 초청장 번호나 현재 직업 등은 안 적는 것도 방법입니다. 반드시 인쇄하여 두십시오.

3. 영사관 접수 신청서; 영사관을 찾기 전에 반드시 인터넷 대기 신청을 해야 합니다. 저의 경우, 대사관 접수를 하여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대사관 접수는 하지 마십시오. 12자리 번호를 주는데, 아무 쓸모 없습니다. 다행히 아침 일찍 방문한 데다가, 거기서 일하시는 직원께서 도와주셔서 휴대폰으로 재빨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받은 16자리 번호를 반드시 인쇄 또는 촬영하여 두십시오. 여기에 나와있는 16자리 번호가 있어야 영사관에 가서도 ‘나가리’를 안 먹습니다. 이 번호를 영사관 내 키오스크 좌측 상단 버튼을 눌렀을 때 나오는 란에 적은 뒤 대기표를 받으십시오. (만전을 기하기 위해 직원 분께 여쭤 보십시오)

+ 이상의 준비물을 전부 챙기십시오. 영사관 비자 업무 시간은 휴일 제외하고 월/수/금 아침 10시 시작입니다. 저는 아침 9시 30분에 맞춰 갔습니다. 물론 저보다 앞서 오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관의 특성상,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많은 분들이 찾아 오십니다. 무조건 아침에 가시기를 추천합니다. 늦게 갈 경우, 당일에 비자를 못 받을 공산이 크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차례가 되어 대기표와 함께 서류 일체를 내면 직원이 언제 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때 가서 비자를 받고, 반드시 비자에 나와 있는 여권번호와 여권에 나와있는 여권번호가 동일한지 확인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亡이기 때문이죠. 동일하다면 영사관을 나오시면 됩니다.

이렇게 받은 비자는 러시아로의 험난한 길 가운데 고작 한 고비를 넘겼음을 의미합니다. 그럼 파이팅.

From R. W. Davies’s.

Original book: The Socialist Offensive (1989, Macmillan Press)

용어에 관하여 (Technical Note)

이 글은 저서에서 사용된 몇 가지 용례를 정리하고 같은 기간 [1929-1930] 동안의 소비에트 행정구조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1) 당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여섯개의 ‘연방 공화국 (Union Republics)’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소련과 각각의 연방 공화국은 모두 인민위원소비에트 (Sovnarkom)를 수장으로 하는 고유한 정부와 함께 인민[정치]위원회 (Narkoms, 즉 정부 부처) 를 보유했다. 몇몇 인민위원회 (예컨대 전쟁과 운송 등)는 소련, 또는 ‘전-연방’ 단위에서만 존재했다. 두 번째 범주 (예컨대 재정과 공업 등)는 ‘전-연방’과 ‘공화국’ 양자 단위에서 있었고, 세 번째 범주 (예컨대 교육 등)는 공화국에서만 존재했다. 1929년 12월 전-연방농업인민위원회 (Narkomzem)가 결성되기 전까지 농업은 각 공화국의 농업인민위원회만이 주관했고, 따라서 농업은 세 번째에서 두 번째 범주로 옮겨가게 된 셈이었다. 이 책은 편의를 위해 전-연방위원회 또는 다른 기관들을 지칭할 때 ‘소련의’를 붙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재정인민위원회 (Narkomfin)’는 소련의 재정인민위원회를 지칭하고, 러시아공화국 단위의 같은 위원회를 가리킬 때는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재정인민위원회’라는 식으로 표기했다. 소련 및 제(諸)공화국의 인민위원소비에트도 이와 유사하게 서술했다. 전-연방 기관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이 책에선 러시아공화국에 해당하는 기관을 약칭으로 표기했다. 따라서 1929년 12월까지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의 농업인민위원회는 단순히 ‘농업인민위원회’라고 쓰지만, 1929년 12월 이후 ‘농업인민위원회’는 전-연방농업인민위원회를 가리키며, 러시아공화국의 농업인민위원회는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의 농업인민위원회’라고 쓴다.

(2) 전통적으로 큰 공화국 지역 정부에서는 차례대로 uezdy (군)과 volosti (지역구)로 나눌수 있는 gubernia (주)가 주된 단위였고, selo (촌)은 최하위의 행정 단위였다. 1929년에 이르러 새로운 구분으로의 이전이 거의 완료되었다. 주요한 단위는 oblast’ 또는 krai (지역)였다. 양자는 같은 위상을 같고 따라서 모두 ‘지역 (region)’로 옮겼다. 각 지역은 여러 개의 이전 주 또는 주의 일부를 포함했다. oblast’와 krai의 차이는 단순히 후자가 그 지역에 속한 자치주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혼란스럽게도 ‘자치공화국 (ASSRs)’은 지역 (oblast’ 또는 krai)과 대략적으로 같은 위상을 지녔고, ‘자치주 (autonomous regions)’는 krai에 속했다. 자치주는 okruga (여기선 단순히 okrugs로 표기하지만, E. H. Carr는 자신의 책에서 ‘부 (departments)’로 썼다)로 나뉘고, 또 다시 여러 개의 raiony (구역)로 나뉘었다. selo (촌)는 최하위의 행정 단위로 남았다. 도시는 각자가 지닌 중요성에 따라 구조의 다양한 단위에 속하게 되었다. 1930년 여름과 겨울, okrugs가 폐기되었고, 따라서 연방공화국 (SSR)-지역 (oblast’ 또는 krai)-구역 (raion)-촌이 기본적인 구조가 되었다. Okrugs를 폐기하기 직전 소련에는 13개의 지역, 207개의 okrugs, 2,811개의 구역, 71,780개의 촌락소비에트가 존재했고, 지역민은 1억 2천만여 명에 달했다. 따라서 구역의 평균 인구는 40,000명 (약 8천 가구)을 상회했고, 촌락소비에트의 평균 인구는 약 1,700명 (약 350 가구)이었다. 또한 15개의 자치공화국과 17개의 자치주가 있었다.

(3) 포괄적으로 말해 당의 구조는 정부의 구조와 유사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상위에 있었지만). 최상층에서 당대회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고, 중앙위원회는 총서기 (Stalin)가 주재하는 정치국 (Politburo)을 지명했다. 정부 (소비에트) 구조에서는 소비에트대회가 매개자인 중앙집행위원회 (TsIK)을 뽑았고, 중앙집행위원회는 의장 (Rykov)이 주재하는 인민위원소비에트를 지명했다. 정치국과 인민위원소비에트는 각각 당과 정부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중심적인 업무체였다. 전-연방 단위 밑으로 공화국은 각자의 정치국, 중앙위원회, 중앙집행위원회, 인민위원소비에트를 보유했다. 모든 지역, okrug, 구역, 도시, 촌락에서 핵심이 되는 관료는 당위원회 서기와 소비에트집행위원회의 의장이었다.

(4) 1929-30년 동안 소비에트대회는 1929년 5월 (5차) 한 차례 소집되었고, 중앙집행위원회도 1929년 12월 한 차례 소집되었다. 당대회 (16차)는 1930년 6-7월 한 차례 (1929년 4월 16차 당회의가 열렸다) 소집되었고,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1929년 4월과 11월, 1930년 7월에 각각 소집되었다 (1930년 7월 전원회의는 당대회와 관련된 공식 행사였다). 정치국과 인민위원소비에트는 자주, 최소 주 단위로 회동했다. 정치국 결의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나온 것으로 공표되었고, 따라서 이 책에서는 그렇게 적었지만, 실상 그러한 결의들은 대개 정치국의 결정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5) 중앙위원회 (실제로는 정치국)는 전임 당관료로 구성된 중앙위원회 산하 부서의 지원을 받았다. 1928년 봄, 시기를 달리하며 바우만 (Bauman) 또는 몰로토프가 주재한 ‘지방countryside에서의 근무를 위한 부서’가 구성되었다. 이 책에서 단순히 중앙위원회 ‘지방 부서’로 지칭한 이 부서는 1930년 1월 폐지되었다.

(6) 농업년도는 7월 1일부터 다음 해의 6월 30일까지이고, 경제년도는 10월 1일부터 [다음 해의] 9월 30일까지이다. 1929/30 경제년도 직후 1930년10-12월은 ‘특별 분기 (special quarter)’였는데, 이후 경제년도와 역년(曆年)이 일치했다. 이 책에서는 소비에트 방식을 따라 경제년도와 농업년도를 ‘1928/29’와 ‘1929/30’처럼 대각선으로 표시했고, 역년을 가리킬 경우엔 ‘1928-9’, ‘1929-30’으로 썼다.

Reserve training

A number of faces, soulless and fatigued, are all you can see when you come to a reserve training in South Korea. I can not describe how our precious time be trashed during this nonsense. Still, a lot of young workers love this because it serves them as temporary respite. For those who studies like me, it is just a freaking waste of time in its purest and sincerest form.